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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자의 일상

딩크로 살고 싶던 내가 아기를 가지게 된 이야기, 운명에 맡기는 것도 방법

by 읽고쓰는사람 2022.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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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딩크로 살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2019년에 결혼을 했고, 가장 선망했던 빅토리아 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일이 잘 풀렸다.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남편은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널싱홈(양로원)으로 진로를 바꿨고, 그 덕분에 짤리지 않고 코로나 내내 일할 수 있었다. 물론 캐나다는 CERB 라는 제도가 있어 200만원씩 지원을 해줬지만 그래도 직장을 다니는 게 돈도 그렇고 커리어면에서도 좋았으니 더할나위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일개미 성향이 있어서 일을 하지 않으면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남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지만 일을 계속 하게된 건 남편에게도, 나의 정신건강에 이로운 일이었다.

둘의 직장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남편은 그동안
가져보지 못한 조금은 사치스러운 취미를 갖게 됐다.
워낙 검소해서 돈을 거의 쓰지 않는 남편을 보며
“무슨 낙으로 사는 지 모르겠어” 하고 말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그는 아직은 저축할 시기라며 딱 잘라 말하곤 했다. 그러던 남편에게 레고 라는 취미가 생긴 것이다. 나는 환영했다. 우리 부부는 각자  번 돈의 몇 퍼센트를 때어 용돈으로 쓰는데 (일종의 보너스 개념)
남편은 그 마저도 차곡차곡 모아 목돈을 만들었다.
사실 남편의 용돈에 너무 쌓이는 걸 보며 조금 불안(?) 했는데, 취미활동에 쓴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와 달리 사고 싶은 것을 그때그때 사고
친구들과 만나 새로운 카페나 맛집을 다니며 쓰는 편이라 용돈이 목돈이 되는 일은 없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각자 경제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월급이 둘다 많은 건 아니지만 충분했다. 난 그저 예쁘고 싼 쓸데없는 물건들을 좋아했고, 먹고 마시면 그만이었으니 큰 돈이 들 일은 없었다. 명품은 부끄럽지만 잘 모른다. 내게는 명품 가방이든 가방이든 가방의 기능만 한다면 가방이다. 명품 가방의 버튼을 누르면 갑자기 자동차로 변신한다던가 하는 게 아니라면, 패션을 잘 모르는 내겐 명품 가방은 그냥 쓸데없이 비싼 물건으로만 느껴진다. 나는 물건의 가격을 정해놓고 지출을 하는데 난 10만원이 넘는 가방은 살 생각이 없다.

그렇게 열심히 모은 돈으로 우리 부부는 집을 샀다.
캐나다 빅토리아는 집값이 사악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외곽에 타운 하우스를 구입했고, 적당한 차도 샀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워낙 인생에 목표가 낮은 우리여서 그냥 집이랑 차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이 살기에는 더없이 여유로웠다. 이대로라면
매년 해외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생활이
만족스러웠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신체와 정신이 그 어느때보다 건강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나완 달리 남편은 조금 허전했던 모양이다. 남편은 좀 전통을 고수하는 성향이 있는데
아기가 있어야 제대로 된 가족을 이룬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듯 했다. 남편은 아기를 좋아하는 성향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아기를 보면 귀엽다고 하고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그때 나는 남편이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딩크로 살며 매년 해외여행 갈 생각에 즐거웠던 나는
남편을 설득하고자 했다. 아기를 가지면 이런 여유로운 생활과는 이별이었다. 무엇보다 난 집순이와는 관계없는 밖순이라 집에서 육아를 하는 건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남편은 자기가 일을 관두고 희생할 생각이 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육아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불안했다. 또 내가 혼자 벌게 됐을 때 쪼들릴 것 같아 불안했다.

어느 날 남편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기를 가질 꺼면 빨리 가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아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 지 상상해보라고, 자기는 아이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등등. 사실 그 날 남편에게 설득을 당했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랬는지 가물가물 하다.
그냥 남편이 아빠가 된다면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혼자라면 못하겠지만 오빠를 믿고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50% 정도는 낳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캐나다에 살다보면 내 나이를 잘 자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곧 내일모레 30대 중반이었다. 예전엔 막연히 그래도 35세가 되기 전에는 아기가 생길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진짜 이러다가는 자연임신이 힘들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이제 결정을 내려야했다. 결정을 내리는 건 쉽지 않았고 나는 계속 유보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안생기면 말지 뭐 하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마음이 오락가락 했다. 남편과 얘기한 그 날부터 자연스럽게 아기가 생긴다면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여야지 하고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에도 시도는 있었지만 배란일을 맞춰서 한 건 1-2번 정도였다. 그러니까 시도를 안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배란일을 맞춰 시도한 지 한 두달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도 아기에 대해 100퍼센트 확신을 못한 상태였다. 동갑인 친구들에게 듣기론 생각보다 임신이 잘 안된다고 하길래 6개월에서 1년은 시도해봐야하나 아니면 난임 센터에 미리 등록을 해야하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친구들은 나보다 어릴 때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았기에 나는 내가 훨씬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난 엄마가 될 운명이었나보다. 임신 테스트기에 명확한 두 줄이 보였다.
난 당연히 생리 전 증후군인 줄 알고 이미 생리통 약도 먹은 상태였다. 엽산도 미리 먹었어야 하는데 그것도 몰랐다. 혼란스러웠다.

임신 초기에는 참 모든 게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으나 나는 이제 38주를 향해 가는 중이다. 적당한 시기에 딱 찾아와준 아기가 지금은 고맙기까지 하다. 임신 해보니까 나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는 게 체력적으로는 나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시기에 임신이 됐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했던 게 큰 도움이 됐나 싶다.

딩크로써 갓생을 살고 싶었지만 내 운명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기가 나오면 또 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겠지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인생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며 살고 싶다는 목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생명을 기르며 느끼게 될 감정과 경험을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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